사도행전 20:7
지난 40년 간 세계 과학계는 거대한 거짓말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믿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큰 증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이론이 과학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단지 그것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 보겠습니다.
지난 40년 간 대부분의 과학자들을 속였던 사기는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진화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발견자들이 내세웠던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이었습니다. 일찍이 40년 이상 동안 이것을 진지하게 조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 의심 많은 사람이 좀더 자세한 조사를 주장하다가 그 두개골이 반은 사람이고 반은 유인원인 존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입니다. 과 학자들은 진화론을 믿었기 때문에 필트다운인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론에 대한 증거를 찾기 원했기 때문에 필트다운 속임수에 완전히 넘어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아주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것과 맞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그것을 믿고자 하여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점검하고 정말 사실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방송에서 토론해 왔던 구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들은 주일의 첫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우리 스스로 조심스럽게 각 구절에 대해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 구절 중 일요일이 경배일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나요? 사람들은 단순히 일요일이 신성하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 구절들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주일의 첫날에 대해 언급한 성경 구절 두 군데를 살펴 봤는데요, 이제 사도행전 20:7을 보겠습니다. 주의 깊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 있네요. 여기 주일의 첫날 있었던 제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 이번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자들이 주일의 첫날 만나 성만찬을 축하하고 종교의식과 설교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 날이 거룩해지나요? 또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주일의 어떤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가졌다고 해서 그 날이 그리스도인들의 경배일로 구별되는 건가요? 또 한가지 질문은 제자들이 여기에서 모임을 가진 날이 정확히 주일의 무슨 날이었나요? 이제 사도행전 20:7~8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창세기 1장을 공부한 기억이 있으실 텐데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우리는 성경의 계산방식으로 저녁, 즉 하루의 어두운 때가 먼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질문 하겠습니다. 이 때가 주일 중 첫날의 어두운 때였다면, 그것은 토요일 밤이었을 것입니다. 새영어성경은 "토요일 밤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려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흥미 있게 적고 있다. 주일 첫날의 어두운 때는 오늘날 소위 토요일 밤이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토요일 밤에 만나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한가지 더 알아볼 게 있는데요. 떡을 떼는 행위가 어떤 날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나요? 잠시 사도행전 2:46으로 돌아가 볼까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기에 기록이 있네요. 제자들은 매일 떡을 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예수님께서는 주일의 무슨 날에 성찬식, 성만찬식을 베푸셨나요?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 즉 금요일의 전 날 밤인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떡을 떼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그 행위로 인해 그 날이 거룩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목요일 밤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뗀다 해도 그 모인 날이 거룩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일의 첫날에 제자들이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이 때가 토요일 밤이었다는 것은 이미 살펴 봤습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창에 앉아 있다가 잠 들어 떨어져 죽은 유두고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들이 내려 갔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 그를 다시 살리셨죠. 그 때 바울은 그 날 밤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계속 강론했고 다음 날 아침, 즉 일요일 아침 지협을 가로질러 19마일을 걸어 앗소로 가서 배를 탔어요. 이 때가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바울이 새로운 믿음을 가졌으면, 바울이 예전의 날을 새로운 날로 대신하려 했다면, 그 날은 배제되고 그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주일의 첫날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안식일을 대신한 날임을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에 없습니다. 물론,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창조 능력의 표시인 날을 바꾸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창조주이십니다. 왜 그 분께서 창조의 기념일을 바꾸셔야 하나요? 우리는 신약에서 그 분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펴 보아야 할 구절이 또 있는데요. 고린도전서 16:1~2를 볼까요?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어떤 사람은 우리가 교회에 가서 주일의 첫날 연금을 내는 것을 암시한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이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일까요?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얻은 대로 저축하여. 아시다시피,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빈곤과 궁핍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보내 여러분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금을 비축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찾아가겠노라. 나가서 새로운 한 주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일의 첫날 그렇게 하라, 그러면 내가 가서 그 자금을 관리할 것이니 여러분은 장부정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 데나 가서 연금을 내라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도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꿨다는 증거는 분명히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신약에 한 구절만 남았는데요. 이 역시도 아무 의미도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 방송에서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계시록 1:10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요한은 자신이 이 날 특별한 감동 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에요? 주의 날에. 주일의 첫날, 주의 날. 일요일을 사전에서 찾으면 주일의 첫날, 주의 날"이라고 나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상으로 주의 날이 어떤 날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계시록 1:10)이 있으며, 예수께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마태복음 12:8)이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일곱째 날이 그 분이 주인이신 안식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구절을 조합하여 성경이 스스로 설명하게 내버려 두면, 주의 날이 있고, 안식일은 그 분이 주인이신 날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일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상 안식일이 아닌 날의 준수를 여기서 알게 된 구절 중 어느 것에도 기초시킬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것이 주일의 첫날을 암시하는 신약의 모든 구절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딜레마가 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는 배교의 시대에 기독교가 생겨날 것을 아셨습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해 쓰고 있고요. 데살로니가에는 그리스도가 몇 달 안에 오실 걸로 믿고 있던 신자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사도는 편지를 써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나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다고 그들에게 확인해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은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놀라운 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으로부터 큰 배교가 나타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반란세력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큰 배교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의 시신이 무덤 속에서 차가워지기가 무섭게 이 배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7절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타협과 배교가 이미 초대교회에 들어 오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신성한 역사의 이 시기에, 사도들이 잇달아 죽고 다른 이들이 일어나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어요. 위대한 믿음,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이 잇달아 타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 속에 온 몸을 담그는 침례는 물을 뿌리는 세례로 대체된 것도 이 때였어요.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성도들에 대한 기도로 바뀐 것도 이 때였고요. 기독교 진리 리스트를 찾아 내려가면 어떻게 그러한 진리들이 잇달아 타협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여러 세대가 걸렸지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살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큰 관심사, 즉 그들 교회의 표준들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 표준은 인기를 위해 일부 교회들에 의해 짧은 시간에 타협되고 방치되었어요. 이러한 타협이 어떻게 기독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살펴 보는 일은 쉬우며, 실제로 그러한 일은 정확히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은 타협된 진리 중 하나였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아주 간략히 설명 드릴게요. 이 기간의 역사를 기억하신다면, 이 사건은 익숙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시대 초기에, 일요일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대중 의식으로 로마제국에서 널리 준수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처음 영향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교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어요.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나가기가 무섭게 準 기독교 철학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모든 종교제도에는 어떠한 선이 있다고 가르쳤으며 다양한 이교 의식과 관습의 채택을 옹호했어요.
예를 들어, 동방 사람들은 얼굴을 떠오르는 해를 향하고 경배 드리는데 오랜 기간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심한 정죄를 받았기는 하지만(에스겔 8:15~16), 그 새로운 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하면서 의의 태양인 그리스도의 표로서 동쪽을 향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교회지도자들은 차이를 최소화하고 두 제도 사이의 유사점들 늘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일요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날이었기 때문에 그 기발한 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의 첫날 적절히 예배 드릴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 두 철학의 융합은 이렇게 해서 수 십 년간의 과정을 거쳐 현실화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