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축복으로 주어진 노동의 명령
안식일 계명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안식일 계명을 단순히 주간의 제7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유대인들을 혐오하는 지식인들 중에 안식일 계명을 노동의 가치를 경시하는 율법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너희는 제7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의 바로 앞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는 명령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다.
“제칠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계명은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라는 계명의 후속 명령인 것이다. 안식일 계명에서 엿새 동안 힘써 일을 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는 제7일에 일을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에 못지않은 중요한 부분이다. 오히려 날수에 있어서는 노동의 날이 무노동의 날을 6 대 1로 압도하고 있다(출애굽기 20장 9절; 23장 12절; 31장 15절; 34장 21절; 레위기23장 3절; 신명기 4장 13절 참조).
성경에서 노동은 사람에게 부정한 것이거나 비천한 것이 아니며 육체적인 노동이 정신적인 노동보다 더 열등한 것도 아니다.노동을 천한 일로 생각하는 관념이나 노동에 귀하고 천한 차별이 있다는 관념은 모두 이교적인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다. 성경에서 노동하라는 율법은 다른 계명과 마찬가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이다(로마서 7장 12절 참조). 그래서 성경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조차도 일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 전체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와 만물을 창조하신 일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에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였으며 창세기 2장3절에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진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시대부터 자신들의 하나님을 노동을 통해 무엇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해 왔다. 주후 3세기에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단적인 집단으로 정죄된 것도 육체적인 노동을 부정하고 천한 것으로 보는 그들의 비성경적인 사상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사람은 창조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노동하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창세기 1장 26, 28절; 2장 15절 참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으며(창세기 1장 26, 28절 참조) 또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것을 경작하며 다스리라.”(창세기 2장 15절 참조)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 노동의 명령으로 노동은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의 명령은 이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인간에게 저주로 부과된 무거운 짐이 아니다. 노동의 명령은 하나님의 다른 명령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위한 사랑의 명령이었으며 인간에게서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하게 하려는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성과 창조력을 나타냈듯이 사람도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 과 창조력을 나타내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일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강요된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의 행위였다.
때문에 인간은 결코 노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노동이 아니라 수고이며 수고가 인간의 운명이 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이후의 현상이다. 선악과의 명령을 어긴 이후로 인간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세기 3장 17절 참조). 노동은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졌지만 수고로 말미암아 인간은 불행해졌으며 노동의 본래적 이미지마저 크게 훼손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회복시키고자 했던 16세기의 개신교 종교 개혁은 노동과 직업의 가치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회복시키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개혁자들은 노동과 직업이 하나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거룩한 소명이라고 가르쳤다.성직자들의 직업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직업이 신성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노동과 직업이 신성하다는 가르침은 당연히 근면을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높이 세우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근면성이 개신교도들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힘써 ‘다 이루고’, ‘다 갚아야 하는’ 6일의 일
매 주간마다 ‘엿새 동안에는 힘써 일하고 제7일에는 아무 일도하지 말라.’는 안식일 계명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생활 방식에 기초한 것이다.즉 안식일 계명은 사람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보여 주신대로 6일 동안에 힘써 네 일을 행하고(신명기 5장 13절 참조)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이 6일 동안에 행하신 세계 창조의 일은 ‘완성’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창세기 2장 2절 참조)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이 6일의 끝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2장 1절; 1장 31절)고 할 만큼 모두 ‘완성되어’ 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그치고’ 제7일에 안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되었건 혹은 사람이 되었건 간에 자신이 시작한 일이 만족할 만큼 완성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손을 놓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사람이 제7일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고자’ 한다면(히브리서 4장 10절 참조) 마땅히 그는 그 앞서 6일의 노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6일 동안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수행하고 그 일을 ‘심히 좋게 다 마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6일의 일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일들이 훌륭하게 완성되지 못하고 여전히 아쉽고 미진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면 비록 여섯 날들의 끝에 제7일이 다가온다 한들 어떻게 그날이 우리에게 안식하는 날이 될 수 있을 것인가?사람에게 일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려는 동기에 기초한 사랑의 행위이지만 또한 기필코 ‘다 이루어 내야 하는’천명으로서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람에게는 천명으로서 한 날의 일이 있고 한 주간의 일이 있으며 일생의 일이 있다. 하루의 일은 하루에 완성해야 하며 한 주간의 일은 한 주간에 ‘다 마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고’(요한복음 9장 4절 참조) 주간마다 제7일이 이르면 ‘아무도 일해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0장 10절 참조). 그래서 사람은 날마다 ‘해가 돋으면 나와서 저녁까지 수고해야 하는’(시편 104편 23절 참조)것이며 매 주간마다 ‘엿새 동안에는 힘써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하루의 밤은 한 주간의 끝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제7일과 같은 시간이며 한 주간의 제칠일은 하루 중에서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과 마찬가지의 날인 것이다.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요한복음 9장 4절)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아직 6일이매 우리를 보낸 분의 일을 우리가 힘써 해야 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할 수 없는 밤과 일하지 말아야 하는 제7일이 오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부여받은 하루의 일과 한 주간의 일을 힘써 모두 마쳐야 한다. 일을 다 마치기 전에는 결코 일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날이 안식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5장 17절).
두렵게도 사람에게 일은 책임이므로 또한 채무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노자는 성인의 마음은 하나같이 빚진 자의 마음이라 말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로마서 1장 14절)고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푼의 부채라도 남김없이 모두 갚기 전에는 그 책임에서 결코 나오지 못한다.”(마태복음 5장 26절 참조)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은 하루의 책임을 하루 안에 모두 마쳐야 평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할 수 있고 6일의 책무를 6일 안에 모두 완성하고서야 가볍고 보람찬 마음으로 7일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것이니”(디모데후서 4장 7, 8절)라고 하였다. 제7일을 맞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한 주간에서 6일은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하는’ 날들이다. 그리고 제7일은 ‘주 곧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를 위하여 예배하여 두셨던 의의 면류관을 내게 주시는’ 날이다. 제칠일의 안식은 6일 동안에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예비된 의의 면류관’과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한 날의 끝에든지 한 주간의 끝에든지 또는 한평생의 끝에든지 ‘각 사람들은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고린도전서 3장 8절 참조). 계시록에서 요한은 주님께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줄 상이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말씀하셨다(요한계시록 22장 12절)고 전하였다. 이런 점에서 안식일은 재림의 날에 받을 상급을 예표 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의 한계와 위험
하나님이 사람에게 “힘써 일하라.”고 분부한 명령(창세기 1장26, 28절; 2장 15절 참조)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노동이야말로 성공과 안정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라고 장려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게으른 자들을 경계했다(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솔로몬은 게으른 자에게 개미의 근면성을 배우라고 권고하면서(잠언 6장 6, 7절 참조),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빈궁하고 곤핍하게 된다.”고 경고하였다(잠언 24장 30~34절 참조).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과 사람이 일 때문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들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시편 127편1, 2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노동의 한계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노동에 따른 인간의 교만에 대해 창세기 11장은 노아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견고하게 구운 벽돌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졌다.’(3~9절 참조)고 전한다.
노동에 따른 탐욕과 교만의 위험은 안식일 계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강조되고 있다. ‘만나의 기적’을 통해 최초로 안식일의 율례들을 가르치고 있는 출애굽기 16장에서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간의 6일 동안 날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탐욕 때문에 만나를 많이 거두어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 두었으나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20절 참조).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분부를 어기고 들로 나간 사람들도 빈손으로 돌아왔다(27절 참조).
6일의 일을 힘써 다 마치고 제7일의 안식에 이르려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 수고에는 시편 127편 1절과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가 전하는 경고가 해당되지 않을까? 죄 되고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처럼 6일의 일을 6일 안에 완성하여 제7일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일이 노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의로 추구하는 제7일 안식에서 사람은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수 같은 안식을 경험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만약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6일의 일을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제7일에 약속하신 안식은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할까? 이 밖의 여러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