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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오만규  >  인류 최초의 성소, 안식일
 

 
 거룩한 삶의 요청과 거룩한 매체로서의 성소
 사람이 영적인 주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요청받게 되는 필생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3, 4절)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대답을 위의 질문의 문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떡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로서(창세기 1장 27절 참조) 하나님에게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장 45절)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산다. 사람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거룩한 교제를 통해서만 함양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거룩한 삶의 요청과 이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실 때에 이미 마련되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사람이 육신의 생명을 위해 음식으로 먹어야 할 열매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게 하시고(창세기 2장 9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직접 그 ‘입으로부터 말씀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소리치는 하나님의 성소이던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떡으로만”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입으로 사람에게 경고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거룩한 매체인 ‘선악의 나무’로 말미암아 산것이다.
 현대는 사람을 향한 ‘거룩한 삶’의 요청이 무시되고 사람을 위한 거룩한 말씀과 거룩한 매체의 필요가 등한시되는 시대이다.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는 더 이상 신성한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시대이다. 현대 사회의 야비하고 난폭한 특성은 거룩함의 가치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인 한에는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상태를 계속하여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인간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거룩하게 됨’의 갈망을 더 이상 참아 낼 수 없다.
 파괴된 인간성과 인간 관계의 치료를 위해 ‘거룩하게 됨’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거룩한 본성과 우리의 거룩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소가 재건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 안에 성소를 선정한 시간의 특성
 그렇다면 태초에 창조주가 신성한 교제를 위해 사람을 자신의 현존으로 초청한 성소는 어디였는가? 사람들은 고대부터 산, 하늘, 바다, 강, 숲, 나무, 돌, 연못 같은 자연이나 공간의 특정한 장소를 신(神)의 거처로 생각하고 신을 만나기 위해 공간의 성소들을 찾았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신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신들을 물체로 조형하였다. 그러나 공간에 한정되는 신이나 물체로 조형되는 신들은 하나같이 영적인 신이 아니라 사람의 그림자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를 마치고 처음으로 사람을 자신에게 초청한 성소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인 안식일이었다고 전한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면 시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시간의 어떠한 특성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가 창조된 후 처음으로 공간이 아닌 시간을 자신의 거룩한 처소로 구별하였는가?흔히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일컬어지는 시간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시간의 신비를 꿰뚫어 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고백록>에서 토로하기를 아무도 자기에게 시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때는 시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 자기에게 묻는 자가 있어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자 비로소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의 일차적인 특성으로 우리는 인간과 시간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존재이지만 인간과 시간의 관계는 인간과 공간의 관계보다 더 근원적이며 더 특수하다. 공간은 시간만큼 인간의 실존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나 물체를 다른 존재에게 양도한다고 해서 그 순간으로 우리의 생존이 끝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시간이 소진되거나 빼앗기는 그 순간에 우리의 생명은 끝난다. 시간이야말로 생존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간에 앞서 시간인 안식일에 자신의 성소를 정하심으로 인간은 일차적으로 시간의 존재라는 사실과 시간의 존재인 인간에게 시간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말로 그 어떤 깨달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환기했다. 성경의 종교는 일차적으로 시간의 종교이고 역사의 종교인 것이다. 모세도 시편 90편 12절에서 “(주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여 시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지혜로운 마음으로 가는 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는 지식”이 지혜의 근본이라 주장하였는데 모세는 자신을 아는 지식은 바로 자신의 날수를 제대로 계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성경 창세기 1장도 사람들에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5절),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8절)고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또 다른 큰 특성은 시간이 사람에게 늘 붙잡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신비와 한계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미래는 항상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으며 현재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우리를 떠나 과거로 사라지고 한 번 사라진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 실존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지만 인간은 시간을 지배할 수 없다. 시간은 오히려 인간의 한계이다. 성경에서 창조주는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했으나 시간을 지배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시간의 지배자가 되려는 인간 포부에 대해 심판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일례로 성경 다니엘서 2장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자신을 시간과 역사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영웅들과 제국들이 하나같이 시간 안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있다. 시간을 지배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무력하게 하는 시간성이야말로 무상한 인간성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 전도서에서 지혜자는 인간이 총체적으로 겪는 시간 경험을 한마디로 ‘헛되고 헛되고 헛된’(전도서 1장 2절 참조) 것으로 회고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한계 밖에 있는 시간의 두렵고 신비한 본성은 공간이 소유하지 못한 특성으로, 시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선택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는 시간의 신비가 인간의 한계 밖에 계신 하나님의 신비와 권세를 잘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 시간을 지배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살 뿐이고 결코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하나님과 시간은 둘 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사람의 지배를 벗어나는 시간의 신비는 이 밖에도 하나님의 매체로서 공간과 대조되는 몇 가지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공간의 매체는 물질적이어서 파손과 파멸을 면할 수 없을뿐 아니라 그 제한적인 본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공유될 수 없어서 항상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살육을 유발한다. 그러나 시간은 보편적이어서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차별받음이나 투쟁 없이 평화롭게 공유할 수 있고 비물질적이어서 파손되거나 파괴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이 붙잡을 수도 없는 시간의 신비는 사람의 영적 시야를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로 이끄는 매체로서 적합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것인데’(고린도후서 4장 18절 참조)‘누가 보는 것을 바라겠는가.’(로마서 8장 24절 참조)라고 강조하였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비와 이해 불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성소에서 예배하는 일을 보편적 역사의 첫걸음으로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적 신비가 보호되고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성소인 안식일의 예배를 통해 창조의 신비와 창조 신앙의 신비가 보호되고 있다.
 시간의 특성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지만 그 못지않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시간은 사람의 지배 밖에 있으나 하나님은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창조주이시지만 공간의 주관자가 되시기 이전에 이미 시간의 주재자였으며 시간과 함께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자연이 아니라 역사 안에 자신을 나타낸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므로 시간 안에 자신의 성소를 선정하여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셨다’(마가복음 2장 28절 참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주와 지배자로서 개인과 집단의 역사적인 운명을 주관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성소도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선택한다. 이교 세계의 공간 성소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그들의 신을 위해 선택한 곳이다. 그들이 선택한 신들이 모두 진정한 신이 아니고 인간의 형상이듯이 그들이 선택한 성소들도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신성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의 구원과 시간의 성소 안식일
 시간은 단순히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갈 뿐아니라 없음(無)으로 질주하며 무상성(無常性)의 어두운 그림자를 현재에 펼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같은 시간에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비존재와 불안정의 위협을 받게된다. 그리고 인간이 현재 사랑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박탈하는 시간의 본성 때문에 인간의 행복도 늘 박탈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무상한 시간성을 극복하여 자신의 안정과 행복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시간성의 위협 아래 있는 인간의 영혼을 안정시키고 통일하는 길은 인간의 시간을 양적으로 확장하는 것일 수 없다. 천 년을 살고 죽는다 해도 죽는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며 시간이 끝없이 연장된다 해도 그것은 불안전하고 결함 있는 시간의 지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간성을 극복하여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의미와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인간의 시간이 영원에 연결되는 것이며 이 일은 오로지 인간의 영혼이 영원자이신 하나님 즉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어제도 계시고 언제나 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만 가능하다. 그러면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영원에 연결될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 시간의 제약을 넘어 영원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먼저 ‘나 있는 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여’(요한복음 17장 24절 참조) 스스로 시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의 하나님은 영원에만 남아 계셔서 인간을 소외된 상태로 놓아두시지 않고 인간과 같이 있기를 원하셨으며 자기를 낮추사 제칠일 안식일로 오셔서 우리를 그 시간 안에서 만나셨다(창세기 2장 3절 참조).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으며 그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역사적으로 예증하셨으며 우리는 이로 인하여 인간의 시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영생하시고 복되신 분에게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자기를 낮추사 안식일로 오신 하나님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어 인간을 이끄시는 행위의 예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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